UX책 좀 추천해줘

참 미천한 경력이지만, ‘UX’라는 단어가 들어간 팀에서 일하다보니 종종 ‘UX책 좀 추천해줘’라는 부탁을 받는다. 듣자마자 머리가 좀 깜깜해지는 부탁이다.

일단 나도 UX가 당췌 뭔지 별로 확신이 없는 것이 첫 번째 문제. 더 큰 문제는, UX라는 말이 붙은 (혹은 연관된) 책들 중 상당수가 대책없이 지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런 질문을 받으면 난 반사적으로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진다.

"왜요?"

리스트를 팍 던지면 대여섯권 한 번에 산 후, 가장 제너럴한 제목을 가진 책을 100페이지 이하 읽고 나머지 읽기도 포기할 것 같아서이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나름, 상황에 맞게 적절한 책을 던져보려고 노력한다. (결국 늘 실패하지만) 생각 정리도 할 겸, 나름의 기준에 따른 책을 정리해본다.

상황 1. 느긋하게 UX 디자인의 전체 과정을 훑어보고 싶다.
그렇다면 : UX 디자인 프로젝트 가이드

  • 장점 : 소위 ‘UX’한다는 것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프로세스 전체를 교과서적으로 정리
  • 단점 : ‘교과서적’이라는 것에 주목. 1. 교과서는 지루하다. 2. 세상은 교과서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상황 2. 인터페이스 설계의 개론을 보고싶다. (시간이 많다)
그렇다면 : 퍼소나로 완성하는 인터랙션 디자인 (About Face 3)

  • 장점 : 인터페이스의 수많은 컴포넌트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 이 책의 3장은 처음 설계 업무를 할 때 정말 많이 참고하게 된다. (사실 그 후에도 계속) ‘사용자 중심 디자인’이라는 말이 넘쳐나면서 들게된 의문 - 그럼 사용자 중심 디자인이 아닌건 뭔데? -에 대한 약간의 답을 얻게 된다. 그걸 여기선 ‘구현 모델’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컴퓨터가 돌아가는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것. 그래서 사람이 쓰기엔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
  • 단점 : 책을 딱 잡는 순간 읽기를 포기하게 된다. 한국어판의 번역이 좀 거칠다. (하지만 그 양을 보면 이해는 간다…) 이 책에 대해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1. 이 책을 모르는 사람 2. 이 책을 다 읽은 사람

상황 3. 상상력과 창의력 터지는, 멋진 과정을 원한다. (현실이 어떻든 간에)
그렇다면 : 사용자 경험 스케치 by 빌 벅스턴

  • 장점 : 가끔 UX라는 것이 긴긴 프로세스와 남의 불평을 묵묵히 듣고만 있어야 하는 답답한 무언가로 느껴질 때가 있는데, 여기서 잠시 벗어나서 ‘발산’의 즐거움을 느낄 방법을 얻을 수 있다. 또 ‘경험’을 디자인한다는게 정적인 시각적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살짝 느껴볼 수 있다.
  • 단점 : 당신이 꽉 막히고 딱 굳어진 조직 안에 있다면, 여기서 제시하는 방법을 처음 시도하는데 굉장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상황 4. 당장 설계서를 그려야 한다. (시간이 촉박하다)
그렇다면 : 웹 폼 디자인 by 루크 로블르스키

  • 장점 : 인터페이스 설계에서 가장 많은 사용성 문제를 일으키는 Form에 집중된 책. 집중되어있다는 뜻은 이 책이 별로 안두껍다는 뜻이다.
  • 단점 : 당신에게 일을 맡긴 사람이 ‘거 포인트가 딱~ 될만한 트렌디한 인터랙션으로 부탁합니다~’라는 식이라면 별 도움은 안될지도… + 모바일에 대한 내용이 좀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상황 5. 준비도 없이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 마음을 움직이는 프로젝트 관리

  • 장점 : 이 책 자체에 마음이 움직인다.
  • 단점 :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글로만 배울 순 없다. 결국 시행착오가 필요.

상황 6. 개발자의 마인드를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 조엘 온 소프트웨어

  • 장점 : 개발자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어떻게 일하고 싶어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 단점 : 개발자가 아니라면 분명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런 부분은 알아서 적당히 넘어가야…)

상황 7. 시간은 촉박한데 뭔가 UX스러운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 린 스타트업 (Running Lean)

  • 장점 : 별로 안두껍다. 당장 따라할 수 있을만큼 잘 정리되어있다. 실제로도 상당히 효과적이다. 프로세스가 아닌, 비즈니스 목표를 정조준한다.
  • 단점 : 일을 시킨 사람이 체계적인 과정이나 숫자를 중시한다면 이 방식을 싫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책 그대로 하려면 진짜 몸이 힘들 것이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듯…)

상황 8.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이게 다 무슨짓인가 싶다.
그렇다면 : 대체 뭐가 문제야? (Are Your Lights On?)

  • 장점 : 별로 안두껍고 엄청 재밌다. 그러면서도 뒤통수를 탁 때리는듯한 시원한 인사이트가 담겨있다. 뭔가 탁- 놓을 수 있는 기분을 선사한다.
  • 단점 : 이 책은 ‘문제의 해결에 대한 책’이 아니다. 문제 그 자체에 대한 책이므로 가벼운 마음가짐이 필요.

상황 9. 한국의 UX 상황 전반을 알고 싶다.
그렇다면 : 전략적 UX 디자인으로 성장하라.

  • 장점 : 해외 번역서들에는 담겨있지 않은 한국의 상황이 잘 들어있다.
  • 단점 : 상황을 안다고 해결책이 보이는 것 만은 아니다.

상황 10. 우린 기술력이 없어서 안될거야 아마…
그렇다면 : 피플 웨어

  • 장점 : 일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 단점 : 글쎄…

이상, 지극히 주관적인 리스트 정리.

*베스트 책들을 뽑았다기 보다는, 얼마 안되는 ‘읽은 책’들을 정리한 것에 불과한 것 같다.

Tags: UX books

"'UX적으로'라는 표현이야말로 UX의 적이다."

— 나

Tags: UX

오래된 제품을 리뉴얼하는 것은

진정 ‘하위 호환성’과의 싸움이구나.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붙어서 ‘거대해진’ 레거시들을 이렇게 대응, 저렇게 대응하다보면 복잡도는 높아지고 버그는 늘어가고 개발기간은 길어지고. 그만큼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은 버거워지고.

이렇게 당하고 있자니 왜 Getting Real류의 제품개발론에서 ‘기능 추가’를 그토록 ‘죄악시’하는지 이해가 간다. 기능이 하나 추가될 때 마다, 정책이 하나 추가될 때 마다 유지비용은 배로 늘어나고, 결국 아무도 전체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다.

그때가서는 아무리 ‘속도가 생명!’이라고 주장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과거를 털어버리고 심플함을 되찾자!’는 것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리뉴얼을 진행할 때 이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피를 보는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적지 않은 듯 하다) 리뉴얼은 제품 제공자의 욕망일 뿐, 쓰는 사람은 결코 ‘새롭게 바뀌는 것 =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이다. 바뀌는 건 그냥 성가시고 귀찮고 다시 배워야하는 것일 뿐… 없던 기능이 생긴다고 기뻐하기보다는 있던 기능이 사라지거나 바뀌는 것에 분노할 뿐이다.

Tags: UX Renewal

사용성 테스트의 비유, 현재까지의 경험 정리

직접 설계한 서비스를 가지고 직접 사용성 테스트를 수행해보는 기분은, 눈을 가리고 목적지까지 걸어가다가 잠깐 가리개를 들어서 앞을 보는 찬스를 얻은 것과 비슷하다.

눈을 감고 앞으로 걸어가면,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두려움이 몰려온다. 바로 앞에 장애물이 있진 않은지, 이 방향이 맞긴 한건지. 실제로 눈을 가리고 걸어가면 바로 발 아래있는 맨홀에 빠질 수도 있고, 완전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사용성 테스트는 왠만하면 해보는게 좋다고 본다. 전혀 안하면, 아무나 잡고 한 번만 물어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실수도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걸어가게 될 수도 있다. ‘눈을 가렸다’라는 비유를 썼지만, 사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프로젝트를 한 달 정도만 참여하면 그 결과물에 대해선 눈이 멀게된다. 설계한 당사자는 모든 기능을 너무나 능숙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서 이걸 딱 누르면 이렇게 딱 되는건데, 이걸 왜 몰라? 다 바보 아냐?)

그리고, 가급적이면 빠른 시간내에 해보는 것이 좋다고 본다.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완전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때는 둘 중 하나다.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빨리 알아채고 제대로된 방향을 찾느냐, 아주 늦게 알아채고 절망하느냐. 조금이라도 빨리, 눈가리개를 들어서 확인해봐야 한다. 빠른 시간내에 꼭 해봐야 한다. 눈을 감고 시작하기 때문에, 사실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확률이 지극히 낮기 때문이다.

그럼 왜, 왜 테스트를 안하게 될까?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다.

1. 귀찮아서.
사용성 테스트와 인터뷰를 하는 것은 무지무지 귀찮다. 사실 눈가리개를 들어올리는 정도로 설명이 안될 정도로 무지무지 귀찮고 힘들다. 시간도 꽤 걸린다.
인터뷰나 테스트가 쓸모없다고 주장할 근거는 너무나 많다.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숫자다, 사용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른다(여기선 꼭 포드와 잡스의 격언이 함께함), 조작이나 유도가 너무 쉽다 등등. 하지만 역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귀찮음’이라고 본다.
일단, 백만명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단 한명도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통계적 의미를 찾는 이에게는 딱 10명만 만나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5명 넘어가면서 계속 똑같은 대답을 듣는 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나오는 똑같은 말이 바로 찾아야할 ‘그것’이다)
사용성 테스트는 애당초 사용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만든걸 주고, 이거 해봐 저거 해봐 하는 것이다. 잘 하면 OK인 것이고, 못하면 거길 수정해야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이다. 거기서 ‘그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거같아?’라고 물어보는 것도 큰 의미는 없다.
조작이나 유도. 무척 쉽긴 하지만, 자기가 직접 설계하고 진심으로 잘되길 원하는 경우라면 굳이 조작이나 유도도 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가 더 많겠지만, 반대의 경우는 그냥 눈을 가리고 쭉 걸어가는 거라고 보면 된다. 뭐 눈을 감고 걸어가도 운이 좋으면 도착할 수도 있는것 아닌가)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귀찮음인 것… 사용성 테스트나 인터뷰를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자. 혹시 한번도 테스트나 인터뷰를 직접 수행해보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2. 잘못 온거면 어떡하지?
잘못온걸 알았다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선 위와 같은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사실 일찍 해도 생긴다) 그래서 그냥 모른척, 끝까지 가보게 된다.

어떻게 할까

여러가지 방법으로 테스트를 진행해봤지만, 음… 일단 지금까지의 미천한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 상당히 심플한 테스트 설계 + 최대한 자세한 프로토타입 + 5~7명 정도를 빠르게 여러번 수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 같다. 테스트에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내기 위해 너무 많고 깊은 질문을 하는 것, 페이퍼 프로토타입으로 진행하는 것은 효과가 많이 떨어질 것 같다.

상세하고 깊은 질문의 문제

긴 시간동안 많은 질문을 퍼부어도, 결국 남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게 일단 문제. 그리고 데이터가 많아져서 분석시간이 오래걸리는 것도 문제. 그리고 질문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인터뷰 대상자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때문에 왜곡도 깊어진다는 것이 문제…
무의식적으로 보인 행동을 조용히 관찰하다가, 행동이 딱 끝나면 ‘방금 왜 그렇게 하셨죠?’ 하는 정도의 간단한 질문 까지만 하는게 좋다. 그것도 뭔가 ‘어…’하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거짓말을 하는걸로 의심해도 될 것이다.
(만약 사용자의 삶이나 실제 사용 패턴을 알아봐야 하는 경우라면, 인터뷰 전에 그 사람의 로그 데이터를 분석해보거나, 다이어리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을 병행해야 한다. 인터뷰 대상자가 나쁜 마음을 먹고, 나를 속이려 들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부정확하다는 것이 문제다.)

페이퍼 프로토타입의 문제

페이퍼 프로토타입은 프로젝트 내부에서 소통하는데는 쓸 수 있지만, 외부 참가자에게 테스트할 때는 별로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실제 사용성 이슈는 아주 작은 아이콘이나 미묘한 색의 차이에서도 발생하는데, 이런건 페이퍼 프로토타입으로 잡아낼 수는 없다. 그리고 가짜인게 너무 티가 나서 몰입이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

Tags: UX usability Test

야후에 가입하고 두 번째 로그인할 때 나오는 화면.이런 페이지를 보면 이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든다. 정보 수집에 있어 지극히 ‘모범적인’ 모습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입 시 Form을 최소화하되 ‘점진적’으로 정보를 수집한다.
정보를 모을 때는 그 이유를 명확히 한다.
페이지를 구성할 때 몇 초 안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핵심 메시지를 가장 먼저 전달한다.
개인 정보의 경우, 안심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교과서적인 이야기들을 실무에서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야후는 하고있었다.
개인적으로 ‘What if you lost access to your Yahoo! account?’라는 메시지가 너무 훌륭하게 느껴진다. 무뚝뚝하게 수십줄의 약관을 들이밀면서 전화번호를 적는 폼을 세 개 뚫어놨다면, 난 별로 내 전화번호를 내놓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저 짧은 한 문장 때문에 난 바로 전화번호를 내어주었다.
그래, 비번 까먹으면 어떻게해…

야후에 가입하고 두 번째 로그인할 때 나오는 화면.
이런 페이지를 보면 이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든다. 정보 수집에 있어 지극히 ‘모범적인’ 모습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가입 시 Form을 최소화하되 ‘점진적’으로 정보를 수집한다.
  • 정보를 모을 때는 그 이유를 명확히 한다.
  • 페이지를 구성할 때 몇 초 안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핵심 메시지를 가장 먼저 전달한다.
  • 개인 정보의 경우, 안심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교과서적인 이야기들을 실무에서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야후는 하고있었다.

개인적으로 ‘What if you lost access to your Yahoo! account?’라는 메시지가 너무 훌륭하게 느껴진다. 무뚝뚝하게 수십줄의 약관을 들이밀면서 전화번호를 적는 폼을 세 개 뚫어놨다면, 난 별로 내 전화번호를 내놓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저 짧은 한 문장 때문에 난 바로 전화번호를 내어주었다.

그래, 비번 까먹으면 어떻게해…

냉장고 정리의 문제

어머니는 이모의 집에 다녀올 때 마다 이모의 냉장고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으신다. 냉장고가 꽉 찼고, 그 중 반 이상은 버려야 할 것들이라는 것이다. 반면 어머니는 냉장고 관리가 매우 철저하신 편이다. 항상 반 이상의 공간을 남겨두시고, 냉장고를 열면 왠만하면 뭐가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게 정리해두신다. 따라서 상해서 버리는 음식도 거의 없다.

냉장고 정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사실 한둘이 아니다. ‘냉장고를 정리해주는’ 업체가 있을 정도이니, 상당히 보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이모도 이러한 업체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냉장고 청소 전문가’가 집으로 와서 냉장고를 한번 싹 치웠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냉장고는 다시 차올랐다. 그러니 이건 상당히 ‘보편적’이면서도 ‘해결이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아버지는 항상 냉장고 앞에 메모를 붙여놓아 냉장고 안에 뭐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하라는 충고를 주신다. 하지만, 냉장고 정리도 안하는 사람이 그 앞에 꼼꼼하게 메모를 할리가 만무하다. 설령 메모를 한다고 해도 제대로 업데이트가 안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메모엔 있지만 냉장고 안에는 없다거나, 냉장고 안에는 없지만 메모에는 있다거나…) 어쩌면 냉장고를 정리하는 일에 메모를 정리하는 일까지 밀려서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냉장고 상태를 악화시키는 습관이 무엇인지를 관찰해보았다. 이모에게서 발견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검은 비닐봉지’였다.

시장에서 사온 물건은 검은 비닐봉지 안에 담겨있고, 그대로 냉장고 안에 들어간다. 냉장고를 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비닐봉지들이 가득하고,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파악할 수가 없다. 검은 비닐봉지 뒤에 있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 뭐가 있는지는 점점 더 알기 힘들어진다.

냉장고 상태를 악화시키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이유는, 냉장고의 공간 특성 상 ‘먼저 넣은 것’이 더 뒤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물건들이 들어가면 더 오래된 음식들은 점점 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버린다. 설령 투명한 용기에 담았다 해도 보이지 않게 된다.

냉장고 공간이 부족한 것은 냉장고가 작기 때문일까? 냉장고가 큰 것은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키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 (실제로 이모는 거대한 냉장고 두 개를 운영중이다) 냉장고가 클수록 냉장고가 깊이는 더 깊어지고 보이지 않는 영역은 더 많아진다.

위 세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냉장고 정리를 어렵게 하는 것은 하나의 이유로 귀결된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이지 않는 것’.

나는 이모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1. 일단 냉장고를 하나로 줄인다.
  2. 절대 검은 봉지를 냉장고 안에 넣지 않는다. 반드시 투명한 용기에 옮겨 담아 넣는다.
  3. 냉장고에 새로운 물건을 넣을 때는 반드시 적어도 하나 이상의 물품을 뺀다.
  4. 무엇이든 간에 마트에서 대량구입하지 않는다.
  5. (손질하고 투명한 용기에 옮겨 담을 시간이 없다면) 비싸더라도 손질이 끝난 걸 산다.

그러면 이모는 냉장고 관리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회의감이 든다.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해결될 문제였다면 이미 해결되었을 것인데… 저 메시지를 ‘충격’과 함께 전해줄 절대자가 필요할 것 같다.

이상, 냉장고에 대한 단상.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냉장고의 문제가 UI설계를 하거나 가이드라인을 만들 때 부딛히는 문제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새로운 기능이 생기면, 영 알기 어려운 레이블을 붙이거나 모호한 아이콘을 붙여놓은 채로 화면안에 밀어 넣는다. (검은 봉지 안의 음식들)
  • 기능들이 들어감에 따라 안그래도 복잡한 화면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 (냉장고의 공간 부족)
  • 차오르는 기능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그 기능들을 쓸어담은 새로운 공간을 뚫는다. (냉장고 추가)
  • 애매한 기능들이 새로운 공간을 가득 채우고, 거기는 아무도 열어보고 싶지 않은 공간으로 남는다. 이들은 퍼포먼스를 떨어뜨린다. (추가한 냉장고 역시 가득 차버리고 전기를 잡아먹는다)
  • 기능 정리를 마음 먹고 누군가가 화면의 모든 기능들을 리스트업한다. (냉장고 앞 메모)
  • 하지만 리스트는 곧 낡아서 아무도 보지 않게 된다. 화면은 여전히 복잡하고, 리스트 정리는 누군가의 업무로 추가된다. (업데이트 안되는 메모)
  • 이를 정리하기 위해 가이드라인이 제시된다. (냉장고 정리 컨설팅)
  • 하지만 가이드라인을 추진할 파워가 없어서 가이드라인은 현실과 멀어지고, ‘가이드라인 정리’라는 새로운 업무만 생겨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 냉장고를 정리하려면. 요즘 내가 고민하는 것이 어쩌면, 아주 거대한 냉장고를 정리하는 일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이 든다.